한국은 암호화폐 강국이다.
숫자부터 보자. 2025년 기준 한국 성인 인구의 약 32%, 약 1,500만 명이 암호화폐를 보유하고 있다. 업비트, 빗썸, 코인원 — 국내 거래소 일평균 거래량은 수조 원대다. 2021년 과열 당시 국내 일평균 거래량이 코스피를 초과하기도 했다.
기술도 있다. 삼성은 스마트폰에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 자산 지갑을 탑재하고 있다. LG CNS는 블록체인 물류 시스템을 구축했다. SK텔레콤은 메타버스 플랫폼에 NFT를 적용했다.
그런데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없다.
일본에는 JPYC가 있다. 홍콩은 2023년 스테이블코인 규제 프레임워크를 발표했다. 싱가포르의 MAS(통화청)는 2024년 스테이블코인 허가 체계를 완성했다. 한국은 2026년 현재,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 허가 체계가 없다.
왜 망설이는가.
답은 두 기관 사이의 간극에 있다.
금융위원회(FSC)와 한국은행(BOK). 하나는 금융 산업 규제기관이고, 다른 하나는 통화 발행과 관리를 담당하는 중앙은행이다. 두 기관은 스테이블코인에 대해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
금융위원회의 논리: 스테이블코인은 금융 상품이다. 투자자 보호, 자금세탁방지, 건전성 규제 프레임워크 안에서 관리해야 한다. 빠른 혁신보다 안전한 제도화가 우선이다.
한국은행의 논리: 스테이블코인은 화폐다. 민간이 원화에 페깅된 디지털 화폐를 발행하는 것은 통화 주권의 문제다.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 효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 두 기관의 관할 범위가 명확히 나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스테이블코인이 금융 상품인지 화폐인지에 따라 규제 주체가 달라진다. 그 정의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2022년 루나·테라 붕괴는 이 망설임에 더 깊은 흉터를 남겼다. 루나는 한국계 스타트업 Terraform Labs가 만들었다. 알고리즘 기반 스테이블코인 UST가 붕괴하면서 1,600억 달러가 증발했다. 권도형 대표는 수배자가 됐다. 국내 피해자만 수십만 명이었다.
그 사건 이후, 한국 규제 당국은 스테이블코인 전반에 대해 더욱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그런데 같은 동아시아에서 다른 길을 걸은 나라들이 있다.
일본. 2022년 자금결제법 개정으로 스테이블코인을 전자결제수단으로 공식 정의했다. 은행, 자금이동업자, 신탁회사만 발행 가능. 법정화폐 1:1 담보 의무. 2023년 JPYC가 이 체계 하에서 운영되기 시작했다.
홍콩. 2023년 스테이블코인 규제 상담문서를 발표하고 2024년 파일럿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홍콩 달러(HKD) 페깅 스테이블코인 발행 허가 체계를 준비 중이다.
싱가포르. MAS는 2023년 스테이블코인 규제 프레임워크를 발표하고, 2024년부터 라이선스 발급을 시작했다. 단일 통화 페깅, 최소 자본 요건, 액면가 환매 보장이 핵심 조건이다.
세 나라의 공통점: 스테이블코인을 금지하는 대신 규제 프레임워크를 만들어 관리 가능한 혁신의 공간을 열었다.
한국이 이 흐름에서 뒤처지는 것은 단순히 혁신의 문제가 아니다. 경쟁력의 문제다.
한국 핀테크 기업이 싱가포르 법인을 통해 스테이블코인 사업을 하는 것이 국내에서 하는 것보다 쉽다면, 그 기업은 싱가포르로 간다. 그 일자리도, 그 세금도, 그 데이터도 함께 간다.
이미 일부 국내 블록체인 프로젝트들이 이 선택을 했다.
그런데 망설임의 이유가 기회를 가린다.
한국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에 유리한 위치에 있다.
첫째, 한국 원화는 안정적이다. 달러 대비 변동성이 아르헨티나 페소나 튀르키예 리라와 비교할 수 없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안전한 아시아 달러 대안"으로 포지셔닝될 수 있다.
둘째, 한국은 동남아 경제권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노동자, 한국 기업의 동남아 공급망, K-콘텐츠 플랫폼의 결제.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이 생태계에서 실용적인 결제 레이어가 될 수 있다.
셋째, 암호화폐 리터러시가 높다. 인구 32%가 암호화폐를 보유한 나라에서 스테이블코인 수용 속도는 빠를 것이다.
망설임이 영원히 이어질 수는 없다. 법안은 논의 중이다. 한국은행은 CBDC 파일럿을 진행하고 있다. 어떤 방향이든, 결정은 가까워지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이미 스테이블코인을 무기로 사용하는 세력이 있다.
국가들이다. 제재를 피하기 위해, 혹은 제재를 집행하기 위해.
달러 패권의 어두운 이면. 그리고 스테이블코인이 열어놓은 보이지 않는 전쟁.
다음 글에서 이야기한다.
— NODOS
핵심 요약
- 한국은 인구 32%가 암호화폐를 보유하지만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 허가 체계가 없다. 금융위원회(금융상품 논리)와 한국은행(통화주권 논리)의 관할 갈등이 배경이다.
- 일본(JPYC), 홍콩, 싱가포르는 규제 프레임워크를 완성해 관리 가능한 혁신 공간을 열었다. 한국 기업들이 싱가포르 법인으로 우회하고 있다.
- 한국은 원화 안정성, 동남아 연결성, 높은 암호화폐 리터러시로 원화 스테이블코인에 유리한 위치에 있다. 결정은 가까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