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앱을 열어보라.
잔고에 500,000원이 찍혀 있다. 그 돈은 어디에 있는가. 금고에 지폐로 쌓여 있는가. 은행 어딘가에 네 이름표가 붙은 봉투 속에 있는가.
없다.
그 숫자는 국민은행의 장부에 적힌 수치다. 정확히 말하면, 은행이 너에게 갚아야 할 채무(負債)다. 네가 돈을 예금했을 때, 두 개의 기록이 동시에 발생했다. 은행 장부의 오른쪽에 "고객에 대한 채무 500,000원"이 적혔고, 왼쪽에 "현금 자산 500,000원"이 기록됐다. 복식부기의 원리다.
그런데 그 현금도, 지금 그 자리에 있지 않다.
은행은 네 돈의 대부분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준다. 법으로 허용된 비율만큼만 남기고. 한국은행이 고시하는 지급준비율은 현재 0~7%다. 은행은 예금의 93% 이상을 대출로 내보낼 수 있다. 누군가에게 빌려준 그 돈은 또 다른 은행 계좌에 예금되고, 그 은행도 다시 빌려주고, 이 과정이 반복된다. 500,000원의 실물 지폐가 경제 전체에서 수백만 원의 '숫자 돈'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신용화폐의 현실이다. 대부분의 돈은 지폐가 아니다. 데이터베이스의 숫자다.
1971년 8월 15일. 캠프 데이비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TV 앞에 앉았다. 주말 저녁 방송을 끊고 특별 연설이 시작됐다. "나는 재무장관에게 달러와 금의 교환을 즉시 중단할 것을 지시했다."
세계는 26년간 브레튼우즈 체제 아래 운영되고 있었다. 1944년 뉴햄프셔 브레튼우즈 호텔. 44개국 대표가 모여 전후 통화 질서를 설계했다. 약속은 단순했다. 달러 35달러 = 금 1트로이온스. 다른 나라의 통화는 달러에 고정. 미국이 보증을 섰다.
그 보증이 깨졌다.
배경에는 이유가 있었다. 베트남 전쟁. 1965년부터 미국은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달러를 찍어댔다. 달러가 넘쳐나자 세계 각국이 의심하기 시작했다. 달러를 들고 미국 재무부 창구에 가면 정말로 금으로 바꿔주는가. 프랑스 드골 대통령은 실제로 배를 보내 금을 회수해갔다. 금 보유고가 급감했다. 닉슨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날부터 달러는 아무것도 아닌 것과 교환 가능한 종이가 됐다. 아니면, 더 정확히는 — 달러 자체가 달러의 근거가 됐다.
이것을 경제학에서는 법정불환지폐(法定不換紙幣), 줄여서 법정화폐(fiat money)라고 부른다. '피아트(fiat)'는 라틴어로 '그렇게 되어라'는 뜻이다. 국가가 "이것은 돈이다"라고 선언하면 돈이 된다.
그렇다면 원화는 무엇인가.
한 장의 만원권 지폐를 한국은행에 들고 가보라. 무엇을 받을 수 있는가. 새 만원권 한 장이다. 금으로 교환해주지 않는다. 은도, 다른 어떤 실물도 아니다.
원화의 가치는 세 가지가 지탱한다.
첫째, 법적 강제통용력이다. 한국 영토 내에서 채무를 갚을 때 원화를 거부할 수 없다. 세금도 원화로 내야 한다. 국가 권력이 수요를 강제로 만들어낸다.
둘째, 외환보유액이다. 2026년 3월 기준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4,276억 달러. 세계 9위다. 만약 원화가 급락하기 시작하면, 한국은행은 이 달러를 팔아 시장에 개입할 수 있다. 보유액은 통화 방어의 탄약이다.
셋째, 국가 신용이다. 무디스, S&P, 피치 — 세 개의 글로벌 신용평가사가 모두 한국에 Aa2/AA/AA를 부여하고 있다. 선진국 수준이다. 국가가 채무를 갚을 능력이 있다는 시장의 판단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 가지가 모두 흔들릴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직접 경험했다.
1997년 11월.
환율은 달러당 845원이었다. IMF 구제금융 신청 이후 석 달도 안 되어 1,995원이 됐다. 원화의 가치가 절반 이하로 증발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한국의 외채가 단기간에 만기를 맞았다. 외환보유고가 고갈됐다. 해외 투자자들이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은 자기실현적이었다. "원화가 위험하다"는 판단이 자금 이탈을 낳고, 자금 이탈이 환율 폭락을 낳고, 환율 폭락이 다시 "원화가 위험하다"는 판단을 강화했다.
신뢰가 붕괴하는 속도는 상상보다 빠르다.
더 극단적인 사례가 있다. 1923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1차 세계대전 패전 배상금과 루르 공업지대 점령. 정부는 돈을 찍어서 지출을 충당했다. 1921년 빵 한 덩이는 250마르크였다. 1923년 11월, 같은 빵이 2,000억 마르크였다. 사람들은 지폐를 난로에 태웠다. 종이로서의 가치가 화폐로서의 가치보다 컸기 때문이다.
이것이 돈의 본질을 드러낸다. 돈은 물질이 아니다. 관계다. 국가와 시민 사이의, 발행자와 보유자 사이의 신뢰의 계약이다.
그 계약이 깨지면 — 숫자는 그냥 숫자가 된다.
다시 은행 앱으로 돌아오자.
500,000원. 그것은 세 층의 약속이다. 은행이 너에게 갚겠다는 약속. 한국 정부가 이 화폐의 법적 통용력을 보장하겠다는 약속. 그리고 시장 참여자 전체가 이 숫자를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집단적 합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이 약속들은 지켜진다. 한국은행은 97년 이후 외환보유액을 열 배로 늘렸다. 지급준비제도가 작동하고, 예금보험공사가 5,000만 원까지 보증한다. 한국의 금융 시스템은 1997년의 교훈을 체화했다.
하지만 신뢰는 자명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축된 것이다. 그리고 어떤 나라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무너지고 있다.
아르헨티나 시민들이 페소를 스테이블코인으로 바꾸는 이유, 나이지리아인들이 자국 정부의 CBDC 대신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선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가의 약속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대신 믿는 것은 무엇인가. 코드다. 알고리즘이다. 아니면 미국이라는 더 강한 국가의 신용이다.
돈이란 결국 누군가를 믿는 행위다.
그렇다면 이 '숫자 돈'이 국경을 넘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한국에서 필리핀으로 100만 원을 송금하려 한다. 그 돈은 어떤 경로로 이동하는가. 실제로 몇 초 만에 도착하는가, 아니면 며칠이 걸리는가. 그 사이에 수수료는 얼마나 사라지는가.
다음 글에서 이야기한다.
— NODOS
핵심 요약
- 은행 잔고는 은행이 너에게 갚아야 할 채무다. 실물 지폐가 아니라 장부의 숫자다. 은행은 예금의 93% 이상을 대출로 운용한다.
- 1971년 닉슨 쇼크 이후 세계 모든 주요 통화는 법정화폐다. 금이 아닌 국가의 신뢰와 강제력이 돈의 가치를 지탱한다.
- 신뢰가 붕괴하면 화폐는 종이가 된다. 1997년 원화 반토막, 1923년 바이마르 마르크는 돈의 본질이 약속임을 보여준다.